초, 중, 고, 대, 대학원을 모두 한국과 미국에서 한 번씩 다녀본 경험

리터니 유학 입시 컨설팅 May 17, 2022

 오늘은 흔한 입시정보, 목표, 그리고 장기적 전략 하나 없이 유학하던 학생이 미국 박사에 입시 컨설팅까지 하게 된 과정에 대해 한 번 이야기 해볼까 합니다. 개천에서 용 난 스토리도 아니고 금수저 스토리도 아닙니다. 그저 평범했던 제 이야기를 통해 범람하는 정보와 주변 사람들의 "충고"에 기죽지 않고 해외 생활과 입시에 임하실 수 있길 바랍니다. 특별히 제가 초, 중, 고, 대, 대학원을 모두 한국과 미국에서 한 번씩 다녀본 경험이 있고 가족과의 해외생활과 혼자 조기유학을 떠난 두 가지 경험도 모두 있다 보니 유학 고민, 리턴 고민, 한국대와 미국대 사이에서의 고민, 미국 대학원 고민 등으로 골머리 앓으시는 많은 분들에게 공감이 될만한 스토리가 있지 않나 생각되어 이렇게 나누어봅니다.

 

1. 첫 해외생활

초등학교 4학년을 채 마치지 못하고 부모님을 따라 처음 미국으로 가게 되었던게 제 첫 해외생활이었습니다. 부산에서 평범한 공립 초등학교를 다닌 저는 미국 도착 후 일주일 만에 들어간 대형 공립학교에서 hi my name is...밖에 할 수 없는 답답한 첫 주를 보냈습니다. 그런데 나이도 어리고 ESL도 잘 갖춰진 (한국인 거의 없는) 학교여서 그랬는지 두세달 쯤 지나니 귀도 트이고 어느 정도 의사소통도 가능해졌습니다. 평일에는 영어만 들리는 학교, 주말에는 영어로 진행되는 한인교회 유년부에 다녔던게 많이 도움이 되었습니다. 3년의 미국 생활이 끝나갈 때 쯤에는 한국어를 다 까먹을까 부모님께서 걱정하셨으니...어릴 때 해외에 나가는 것의 장점을 몸소 경험했던 것 같습니다.

 

2. 첫 리턴

중학교 2학년으로 부산에 돌아왔을 때 꽤나 큰 컬쳐쇼크를 경험했습니다. 동네에 있는 일반 남중으로 들어가 등교한 첫 날, 시멘트 바닥으로 된 학교를 웃통 벗고 땀범벅이 된 채 뛰어다니는 호르몬 결정체와 같은 아이들, 그리고 체벌을 하는 선생님들을 본 것은 "미국으로 돌아가고싶다"는 강한 염원을 제 마음에 심어주었습니다 (80년대 이야기가 아아니고 이게 이미 2000년대 중반이었습니다). 해외 생활을 하다 한국에 돌아온 학생이 전교에 저 하나였으니 신기하다는 대우를 받기도 하고 영어 시험 때만 되면 다들 제 옆에 앉고 싶어 했던 기억도 나네요. 영어를 잘 하는 것이 한국 공립에서 아주 큰 자신감의 원천으로 작용했었던 것 같습니다. 이 시절 지금까지도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을 만나게 되었고 정말 즐거운 학교생활을 했지만, 첫 날의 비주얼 쇼크 때문인지 저는 언제나 마음 한 켠에서 미국을 더 선호했던 것 같습니다.

 

3. 두 번째 해외 생활

이 시절 학교 공부는 열심히 하는 편이었지만 동네 수학 학원 하루 한시간 가는 거 제외하고는 정말 열심히 놀았습니다. 그런데 혹시나 해서 쳐 본 토플 시험 점수가 생각보다 잘 나온 덕분에 학교 성적이 그저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영어 특기자 전형으로 외고에 진학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미국 고등학교 합격을 받아놓은 터라 외고는 한 학기만 다니고 10학년으로 다시 미국에 가게 되었습니다. 미국 사립학교라고 말하면 보딩스쿨 등을 생각하실테지만, 제가 간 곳은 한국의 특목고 보다도 학비가 저렴한 대안학교 성격의 기독교 사립학교였습니다. 학생은 한 학년에 30명 정도밖에 안되고 대학 진학률은 50% 언저리, 그 마저도 태반이 2년제 커뮤니티 컬리지로 진학하는 학교였습니다. 대입 카운슬러도 따로 없었으니 할 말 다 했죠. 정말 순수하게 미국에 너무 돌아가고 싶어서 앞뒤 안가리고 부모님께 졸라서 갔습니다.

 

미국 고등학교에서의 3년은 참 좋았습니다. 주어진 공부 열심히 하고, 3시 30분 하교 후에는 열심히 놀고, 축구부, 밴드부 등 취미활동을 참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학교 커리큘럼은 AP수업이 하나도 없는 정말 기본만 제공하는 커리큘럼이었고 그나마 대입 원서에 쓸 수 있는 EC는 학교 축구부와 저널리즘 클럽 정도였습니다. 11학년 이후 여름 방학에 처음 본 SAT 시험 점수는 참담했습니다. 당시 2400점 만점에 1700점 정도가 나왔던 것 같네요. 근거 없이 스스로를 똑똑하다고 생각했던 저는 문제집 한 번 보지 않고 오만하게 시험장으로 갔고, 이 오만함이 드디어 여기서 무너졌습니다. 그제서야 정신 차리고 그 여름 세 달을 근처 도서관에서 하루 열 두시간 씩 SAT만 했던 것 같습니다 (물론 이건 앉아있는 시간이었고...실제 공부시간은 훨씬 적었겠죠ㅎㅎ). 가르쳐 줄 사람도 없고 단어 외우기는 죽기보다 싫어서 그냥 서점에 있는 모든 SAT 문제집을 반복해서 풀었습니다. 결국 10월 SAT에서 기적처럼 2100점 정도의 점수가 나왔는데, 분명한건 제 실력보다 점수가 잘 나온 것이었습니다.

 

대학 지원 과정도 그냥 혼자 보이는대로 원서를 쓰는게 전부였습니다. 원서를 쓰는데 EC 란에 별로 쓸게 없어 당황했던 기억도 생생하게 납니다 (왜 칸이 10개나 있는건지...). 드림스쿨이었던 시카고 대학 원서에는 영상을 본 뒤 문학 분석을 요구하는 에세이 지문이 있었는데 저는 문학 분석이라는 개념 자체를 그 때 처음 들어봤습니다. 그 결과 그냥 초등학생 마냥 느낀점을 쓰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하는 등 고등학교 커리큘럼의 수준이 낮아서 꽤 많은 피해를 봤습니다. 옵셔널이라 적힌 것은 모두 스킵했던 것도 지금 생각하면 충격이네요. 컨설팅이라는게 있다는 것 조차 모르고 있었으니 입시 정보에 있어서는 정말 장님이었죠. 찾아볼 생각도 안했습니다. 모두가 이렇게 그냥 주어진 상황에 맞게 대학을 가는 줄 알았죠. 부모님도 무작정 그냥 저를 믿어주셨구요. 옆 공립학교 친구가 저보다 낮은 GPA와 SAT점수로 저는 웨이팅을 받은 학교에 합격을 받은 것을 보고 의아해 했었는데 이제와서 생각해보면 학교수준이나 EC의 차이가 작용했겠구나 싶습니다. 결과적으로는 웨이팅에 기대를 걸지 않고 중상위권 주립대에 가기로 결정했는데, 지금은 웨이팅 푸는 전략을 가르쳐주는 사람으로 일하고 있으니...참 정보가 어찌보면 인생을 바꾸는 것 같기도 하구요.

 

4. 두 번째 리턴

그렇게 대학에 입학한 저는 학교 공부는 성실히 했지만 1학년이 끝나자 마자 전과를 하는 등 여전히 긴 호흡의 전략이나 생각 없이 그냥 본능적으로 인생의 결정들을 내려가고 있었습니다. 2년만에 시골 캠퍼스가 질렸던 저는 런던정경대(LSE)로 교환학생을 갔고 도시의 매력에 빠져 도시에 있는 대학으로 편입을 다짐하게 됩니다. 그렇게 간 곳이 바로 서울에 있는 고려대학교였습니다. 1차 영어시험과 2차 전공시험이 있었는데 해외대 출신의 동일 전공으로 지원한 저에게 여러모로 유리한 유형이었습니다. 긴 유학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리턴하는 것에 대해 주변에선 회의적인 시선이 대부분이었습니다만 저는 도시에 살고싶었기 때문에 강행했습니다. 대학을 갈 때도, 편입을 할 때도, 부모님께는 그저 "나 여기 대학 갈려고" 라며 통보만 해왔는데, 지금 생각하면 얼마나 아찔하셨을지 죄송하네요. 한국에 돌아와서 첫 학기 한글 글쓰기가 힘들어 조금 고생한 것을 빼면 한국 대학은 참 재미있었습니다. 공부도 노는 것도 다 열심히 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지내며 서울생활을 했던게 참 큰 추억이었습니다. 청와대에서 영문에디터로 일도 해보고, 외국계 제약회사나 국책연구재단 등에서 인턴도 하는 등 여러 활동을 했습니다. 문과 출신 외국인의 입장에서 인턴쉽 기회는 확실히 미국보다 고국에서 옵션이 많은 느낌이었습니다.

 

5. 대학원 유학과 갭이어, 그리고 박사

실컷 스펙을 쌓아놓고 취업보다는 대학원을 가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동대학교 대학원에 입학해 정치철학을 공부하며 미국 박사 준비를 했습니다. 이 당시의 철학을 공부한 것은 결국 고등학교 때 배우지 못한 문학 분석이나 논리와 같이 다층적으로 사유할 때 필요한 능력을 보충하는 시간이었습니다. 미국박사지원 1차 낙방 이후 시카고대학의 석사 프로그램으로 진학하였고 그 곳에서 제 플래그십 라이팅 프로그램인 시카고라이팅의 초석이 되는 라이팅 교육도 받았습니다. 이후 상해로 넘어가 낮에는 박사 원서를 쓰고 저녁에는 라이팅을 가르치며 갭이어를 보낸 뒤 결국 미국 박사과정에 진학했습니다.

 

6. 돌아보며

이 여정을 돌아보면 저는 굉장히 특이한 선택들을 했다는 생각이 듭니다. 외고까지 갔는데 굳이 미국의 안좋은 고등학교로 전학을 가고, 실컷 미국 대학 가놓고 한국으로 리턴하고, 매 년 인턴을 해놓고 취직대신 공부하러 대학원 가고. 돈 안되는 철학쪽으로 전공을 틀고, 박사는 다시 계량적인 연구로 돌아가고. 겉보기엔 일반적인 조기유학-한국학부-한국석사-미국박사 루트를 밟았음에도 불구하고 정석적으로 갔다고 하기엔 정말 많은 길을 돌며 다양한 경험을 했습니다.

 

그런데 확실한 장점도 있었습니다. 먼저 합격하는 방법에 대해 많이 배웠습니다. 학교를 그렇게 바꿔대고 전공도 바꾸고 커리어도 바꾸고 이런 저런 일도 해보면서 부득이하게 거의 1-2년 주기로 새로운 어딘가에 “합격”을 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고 그렇다 보니 무엇이든 합격하는 방법을 배웠습니다. 그게 원서 컨설팅에서의 성공적인 지표로 표출되고 있는게 아닌가 싶네요.

 

두 번째 장점은 바로 비용 절감입니다. 초등학교 시절 미국에서는 부촌 옆에 붙어있는 저렴한 동네에 살며 부촌에 있는 공립학교를 다녔습니다 (동부에서 손꼽히는 학군이었습니다). 또 한국 고등학교보다도 저렴한 학비의 미국 사립 고등학교를 나와 학비와 생활비가 비교적 저렴한 주립대를 2년 다닌 후 한국대로 옮겨 학비를 많이 아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연간 3천 정도를 사용한 것 같고 미국대학을 다니면서도 총 비용이 연간 6천만원을 넘기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부모님께서 항상 1년치 생활비를 한번에 보내셨기 때문에 돈관리 할 당시의 총액이 기억이 납니다. 당시에 도시로 유학 간 친구들이 1년에 1억씩 쓴 것과는 비교가 되었죠. 한국에서의 석사과정에서 장학금과 조교 일로 학비를 충당하고 시카고대학에서의 석사과정에서도 꽤 많은 장학금을 받으며 다녔습니다. 박사과정은 당연히 전액 장학금에 생활비 까지 주고요. 현재는 라이팅 수업과 원서 컨설팅으로도 추가 수입도 있는 상황이구요.

 

제가 보통의 유학 루트를 겪었다라고 말하려는게 아닙니다. 제 경험을 따라 하라는 것도 아니구요. 요즘 조기유학 가는 아이에게 1년에 3천만원만 가지고 가라는건 말도 안되겠죠. 제가 비교적 자기주도적인 학생이기도 했고, 모든 학생들이 그렇지 않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2000년대 중후반과 현재의 교육 환경이 조금은 다르다는 것도 알고 있구요. 단지 최고의 학교, 최고의 학군, 최고의 자원을 누려야만 좋은 결과가 나온다라는 부담을 조금 덜으셔도 된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뻔한 행선지를 향해 가더라도 정말 다양한 길이 존재한다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저같은 무정보 무계획 방식으로도 마음이 이끄는대로, 상황이 이끄는대로 살다 보니 궁상맞지 않게 유학 했고, 어찌되었든 소위 SKY를 갔고, 어찌되었든 미국 탑스쿨 대학원도 가봤고, 어찌되었든 미국 박사까지 갔고, 하고싶은것 하며 즐기면서 살고 있다는 것이 자녀에게 최고의 국제학교, 최고의 학원, 최고의 학군을 제공하지 못하시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대안에 대한 고민의 폭을 넓혀드렸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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